권력의 정점에서 맞이한 최후, 카이사르는 왜 암살되었을까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혹시 카이사르와 시저는 어떤 사람인지 아시나요?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는요?
네, 맞아요. 율리어스 카이사르와 율리어스 시저는 같은 사람이랍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로마 고대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카이사르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이 글에서는 시저 대신 카이사르라고 소개할게요!

카이사르의 탄생과 장군으로서의 생활

카이사르는 언제 태어났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약 기원전 100년쯤 태어났다고 하고요, 귀족 가문이었다고 해요.

카이사르는 청년이 되면서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이때의 로마는 개혁의 움직임이 일고, 노예 반란이 계속되었으며, 정치가들 간의 다툼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정당이 평민파와 귀족파입니다.

먼저 평민파는 로마 시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원로원을 무시하고 민회의 결정만을 따르고자 했고, 귀족파는 평민파가 독재를 꿈꾸고 있다면서 공격했어요.

카이사르는 이들 중 누구의 편을 들었을까요? 네, 바로 평민파입니다. 카이사르는 수많은 돈을 모으고 로마로 다시 돌아와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사람들에게 여가생활을 제공하는 데 큰 돈을 써서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아졌다고 해요.

카이사르는 더 큰 명예를 얻기 위해서는 전쟁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원정을 떠났는데요, 쉽지 않은 싸움이었으나 카이사르는 손수 병사들을 간호하여 싸움을 이끌어 내었고, 약 8년간의 싸움 끝에 갈리아를 물리치게 됩니다. 이외에도 카이사르는 기원전 55~45년,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을 침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승승장구가 계속되는 것은 역시나 무리였나 봅니다. 이제 카이사르에게 위기가 닥쳐오게 되어요! 카이사르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에 바쁠 따를 큼타 집정관의 자리에 폼페이우스를 앉힙니다.

종신 독재관이 되다

화가 난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식민지와 로마의 경계인 루비콘 강을 건너는데요, 이때 반란이 시작하게 된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깁니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쳐들어갔고, 이집트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두려워한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 죽고 맙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쫒아 이집트로 갔고,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만납니다. 로마로 돌아오기 전 그는 이집트 내전에 참가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으로 만들었으며, 나중에 로마로 데리고 왔습니다.

계속되는 승전보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터키 젤라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물리쳤어요.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라는 유명한 승전보를 남겼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 등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완전한 지도자가 되다

이제 카이사르에 대항할 세력은 아무도 없습니다! 카이사르는 황제나 다름없는 종신 독재관 자리에 올라 사회 구석구석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카이사르는 먼저 시민들에게 곡식과 땅을 나누어 주고 대규모 공사를 벌여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빛을 너무 많이 진 사람의 빛을 덜어 주고, 세금마저 깎아 주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정책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그가 얻은 권력을 잘 활용해 중요한 개혁들을 단행했으며. 로마와 속주의 불명예스러운 관행을 통제하려고 했고, 달력을 개정해 율리우스력을 만들었습니다. 또 이탈리아 도시를 재조직하려는 계획도 수립했고, 정적을 공직에 임명해 화합을 꾀했던 데다가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카르타고와 코린트에 식민시를 건설해 로마의 무산시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곡물을 무상으로 분배했지만 결론적으로 빈민을 줄이지는 못했다고 해요.

그는 왜 암살되었을까?

독재관의 자격으로써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정원을 600명에서 900명으로 늘려 정치적으로 힘이 약했던 군대의 부하와 동료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상으로 내렸고, 이탈리아 인이 아닌 외국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합니다.

원로원 의석과 시민권의 확대는 나이 많은 원로원 의원들, 특히 원로원파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카이사르가 공화국 체제를 무너뜨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 한 그가 만족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로마의 여러 문제를 처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그들의 불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생각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그가 종신 독재관에 오른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더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3월 15일 카이사르는 대형 석조 극장에서 23명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둘러싸였고, 한 단도가 그에게 깊숙히 꽃혀 그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를 어떤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카이사르는 단순히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과 갈등의 상징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권력을 꿈꾸고, 성공을 갈망하며,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삶은 그러한 욕망이 가져올 수 있는 파괴적인 결과를 경고합니다. 우리는 카이사르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되돌아보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오늘 포스팅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글로 다시 찾아올게요^^

rimo ma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리모스토리의 포스팅을 하고 있는 RIMO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고, 리모스토리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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